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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신 ‘국뽕’이라는 말은 꽤 자주 쓰인다. 맨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가리킬 때 국뽕이란 단어를 썼다지만, 이제 와서는 긍정적인 상황에서도 쓰인다. 이를테면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네 개의 상을 수상했을 때 ‘국뽕에 취한다’는 반응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즈음부터 헬조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곳곳에 접두사 ‘K’가 붙었다.
K는 MZ세대와 다른 세대를 구별 짓는 키워드 중 하나다. 한 조사 결과를 보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하는 ‘한국인의 의식 및 가치관조사’다. 1996년부터 8차례 실시된 이 조사에서는 항상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자긍심’ 정도를 묻는다. 2008년에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이 자랑스럽다고 대답한 19~29세는 49.6%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14년이 지난 2022년 20대는 거의 대부분, 96.2%가 자랑스럽다고 대답했다. 다른 연령대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2008년에 한국 대중문화를 자랑스럽지 않게 생각하던 20대는 이제 40대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40대는 K가 성장하는 과정 동안 마음이 바뀌었다. 그런데 지금 20대는 자랑스러운 K의 수준이 당연한 줄 안다. 이 차이는 K와 K에 속한 ‘우리’에 대한 자부심의 차이로 이어진다.
환상이 없는 최초의 세대, MZ
지금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때 MZ세대 사이에 유행하던 동영상은 ‘리액션 비디오’다. 리액션 비디오란 어떤 컨텐츠를 보고 반응하는 모습만을 찍은 것이다.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를 시청하는 팬들의 모습을 찍어 ‘방탄소년단 뮤비 리액션’이라고 이름 붙여 보여주는 식이다.
한국 유튜브에는 이런 리액션 비디오가 수없이 많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마블(MARVEL) ‘어벤져스’ 시리즈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음식을 먹고 보인 반응을 찍은 동영상은 22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자랑한다. 시각장애인이 의식을 잃은 것처럼 연기했을 때 시민들이 보인 반응, 팔을 다친 고등학생을 발견한 초등학생들의 반응을 찍은 ‘사회실험’ 동영상은 각각 1400만, 1300만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런 리액션 비디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개 리액션 비디오는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우수한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치안은 매우 안전한 수준이라는 점을 체험하는 외국인이 등장하는 동영상들은 수백 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곤 한다. 한국의 대중교통 시스템의 편리함을 보여주는 동영상의 조회수는 300만회를 넘었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 영상들은, 영상의 시청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준다. 사람들은 선진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있다.
한국 사회가 가졌던 선진국에 대한 ‘환상’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이 환상 속에는 선진국의 사회 시스템이나 정치 구조 같은 것에 대한 동경도 있었지만, 선진국에 대한 ‘경험’ 또한 포함돼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아무나 선진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업무차 선진국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거나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는 것, 짧게는 여행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 모두 상황과 자본이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여행리서치 전문회사 컨슈머인사이트가 매년 시행하는 ‘여행 행태 및 계획조사’의 2019년 보고서를 보면 일년 사이 보통 한국이 동경하는 북미 및 유럽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온 비율은 15%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선진국을 경험함’에 대한 환상은 일종의 계급적인 문제다. ‘수저론’에 빗대자면 선진국에 대한 환상은 선진국을 경험할 수 있는 수저에 대한 환상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선진국을 경험하고 돌아오면 삶이 변화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 환상은 MZ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균열이 시작됐다. K는 우리의 ‘수준’이 선진국에 못지 않음을 확인시켜 줬다. ‘어쩌면 우리는 선진국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Why not? 장애물 없는 MZ세대
그런 점에서 MZ세대는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없는 최초의 세대다. MZ세대는 ‘이 좁고 작은 나라에서!’라는 감탄사를 잘 쓰지 않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안녕하세요’가 통한다는 것을 안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 것이 곧 외국에서도 인정 받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 미국 방송에 나와서 영어를 쓰지 않더라도 ‘why not?’ 별 일 아닌 듯이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BTS나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로컬 시상식’으로 정의내리는 봉준호 감독에게 공감을 표하는 MZ세대가 많은 이유다.
2023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던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 2023’을 되짚어보자. 내노라하는 글로벌 기업을 포함해 전 세계 174개국 3000여개 사가 총출동하고 10만 여명의 관람객이 찾는 거대한 규모의 행사에 가장 많은 기업을 내세운 두 나라는 미국 그리고 한국이다. 486개의 크고 작은 한국 기업은 곳곳에서 관람객을 끌어 모으며 신기술을 뽐냈다. 개중 많은 수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무장한 청년 스타트업이다.
30대 초반의 나이로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 ‘앙트러리얼리티’를 세운 이동윤 대표도 그 중 하나다. 창업한 지 15개월 만에 CES라는 무대에 올라선 그는 CES 참가 이야기를 하면서도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그만한 무대에 초대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시간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파악해 아바타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곳은 많지만 우리만큼 실용화한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관람객이 몰려 들었고, 실제 성과도 많이 냈지요.”
기업의 규모가 작다거나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등의 조건은 별 장애물이 되지 않아 보였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장점에 대한 자부심인 듯 보였다.
이런 MZ세대가 늘고 있다는 것은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2016년에 전체의 10%가 채 되지 않았던 20대 미만 청년이 창업한 기업의 수는 꾸준히 늘어 5년 뒤에는 13%를 차지했다.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도 늘어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MZ세대의 기업가정신은 2019년에 비해 2022년, 3년 사이 크게 증가했다.
딱히 비교하는 일 없이, 남의 인정 없이도 내가 잘 하면 되는 세대, 어쩌면 MZ세대에게는 K라는 이름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자아’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김서윤 하위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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