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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Talk] 영화 빨리 감기로 보는 시대


스트리밍의 시대, 많아진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방법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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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의, 따끈따끈하고, 생생한 테크 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테크토크(Tech Talk)’. 최근에 익숙해진 OTT 빨리 감기를 통해 미디어를 소비하는 방법의 변화와 나에게 맞는 정보처리 방법에 대한 이요훈 칼럼니스트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세요.
*본 글은 외부 필진의 기고로 현대카드∙현대커머셜 뉴스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 OTT 서비스에서 몇 년간 일했다. 등록되는 영상 콘텐츠를 검토해서 잘 팔릴 것과 아닐 것을 나눠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매주 몇 십 시간 분량의 영상을 봐야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폈다가, 저자도 비슷한 일을 전에 했다는 걸 알고 친근한 마음을 가졌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세상 다른 곳에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친근감이 깨지는 건 금방이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매주 수십 시간이 넘는 영상을 보려면 빨리 감으며 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런 영상 시청법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 않는 것이라 단언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분이 묘했다. 같은 ‘업’에 있는 사람한테 듣기 싫은 얘기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Z세대의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에 반감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콘텐츠 소비 행동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이유

“Z세대는 기댈 곳이 필요하다. 개성 있는 존재가 되려면 더 많은 작품을 봐야만 한다. 그들은 이 과정을 ‘가성비 좋게 해결’하길 원한다. 그래서 “봐야만 하는(읽어야 하는) 중요한 작품을 적어달라”고 한다. 그들은 재미없는 작품 때문에 시간 낭비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한다. 수많은 졸작을 거친 끝에 자신만의 걸작을 만나는 희열을 알지 못한다. 가급적 힘을 덜 들이고 돌아가는 길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하는 동기와 뿌리를 같이 하는 맥락이다.”

-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서 인용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새삼스레 왜 주목받았을까? 아마 간단한 설문 조사를 통해, 실제 조사 결과를 확인시켜 줬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책을 쓴 이나다 도요시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수업에서, 수강생 12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 ‘빨리 감으며 영화를 보는 사람(자주, 때때로)이 66.5%라고 밝혔다.

그 전에 일본 리서치 회사 크로스 마케팅에서 시행한 조사 결과는 그보다 조금 낮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20~69세 남녀 가운데 빨리 감기로 영상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34.4%였다. 특히 젊은 층에 흔해서 20대 남성은 54.5%, 20대 여성은 43.6%에 달했다. 이 차이를 저자는 20대 중에서도 보다 젊은 대학생이 더 많이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거라고 설명했다.

왜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걸까? 이나다는 크게 3가지 이유를 든다. 첫째,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봐야 할 작품이 너무 많다. 스트리밍 영상 서비스가 인기를 끌면서 영상 하나를 보는 비용이 많이 싸졌고, 화제가 되는 작품도 늘어났다. 둘째, 시간에도 가성비, 그러니까 타임 퍼포먼스라는 것을 따지는 사람이 늘었다. 셋째, 빠르게 봐도 상관없도록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작품이 늘어났다.

저자가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보는 소비 행동’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며 작품을 감상하지 않고, 영상을 필요 때문에 소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비 행태에 맞춰 영상을 제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시청자가 감상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바뀌면서, 작가를 무시하는 행동을 못마땅해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우린 원래 그랬다. 예를 들어 책을 보자. 19세기에 인쇄가 기계화되면서 가격이 내려갔고, 장거리 기차 여행 때 읽을 콘텐츠가 필요해졌다. 20세기 들어와 의무 교육을 받으면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빠르게 늘어났다. 수요가 있고 기술이 되니 출판 산업도 성장했고, 산업 성장에 따라 인쇄물도 늘었다. 정보가 늘면 항상 그걸 정리할 방법이 필요하다. 1922년, 기사 내용을 요약한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창간됐다. 1950년대, 책을 빠르게 읽는 속독법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디어는 원래 그렇게 존재한다

“미디어는 문화적 체계이다. 전달 기술들은 새로이 등장하고, 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하지만 미디어는 정보와 엔터테인먼트의 복잡다단한 계층의 한 단계로서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미디어가 인간의 핵심적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자리 잡게 되면, 더욱 거대한 커뮤니케이션 방법 집합 체계의 일부로서 작동하게 된다.”

- 헨리 젠킨스가 쓴 책 ‘컨버전스 컬처’에서

MIT 인문학부 교수 헨리 젠킨스는 미디어란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에는 전달 기술로 이해되지만, 나중에는 콘텐츠를 생산, 유통하고 소비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해서 말하게 된다고. 우리가 라디오라고 부르는 미디어는 처음엔 전파를 수신해 소리를 내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러다 나중엔 방송국에서 만든 방송을 송신하고, 방송을 듣는 청취자가 다시 참여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

콘텐츠 자체는 사라지지 않지만 다른 미디어 기술이 나타나면 그에 맞춰 생산 과정이나 사업 모델, 소비 방식이 바뀐다. 다만 새로운 미디어도 경로 의존성이란 측면에서 과거 미디어를 완전히 부정하며 존재할 수는 없다. 사람은 과거의 사용법에 의존해 새로운 미디어를 받아들인다. TV도 처음에는 ‘보이는 라디오’로 이해됐다.

빨리 감기는 책처럼 원하는 부분을 바로 펼쳐볼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 형식 기술이 도입될 때 나타난 이용법이다. 콘텐츠를 저장한 매체가 한 줄로 이어진 테이프 형태라서, 원하는 부분을 찾아가거나, 보기 싫은 부분을 건너뛰려면 빨리 감거나 되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용법에 많은 사람이 익숙해져 있기다. 디지털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에도 빨리 감기, 뒤로 가기, 다음/이전 곡으로 가기 버튼 아이콘이 붙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기능으로만 쓰였다. 예전에 빨리 감기로 영화를 본 적이 없기에, 빨리 감아 본다는 생각을 못 한 탓이다. 하지만 디지털 영상은 아날로그 영상과 다르다. 책처럼 중간 영상에 클릭 한 번으로 이동할 수 있다. 영상 재생 속도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은 검색에 유용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에 좋았다.

그러자 그런 특징을 살리는 쪽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실제로 얼마만큼 빠른 속도로 봐도 영상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관한 연구는 2003년에 나왔다. (How fast is too fast? evaluating fast forward surrogates for digital video,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1204866) 영상에 미리 보기 장면을 삽입해 찾아보기 쉽게 만들거나, 책 목차처럼 글로 영상의 시간 단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붙이는 것도 이때 이미 수행된 연구다. 기능이 등장하자 찾아보기가 아니라 감상용으로 쓰는 사람이 늘어났고, 이젠 건너뛰기와 더불어 디지털 동영상을 볼 때 기본 사용법으로 자리 잡았다.

빨리 감기 시대, 어떻게 살면 좋을까?

“나는 더는 주어진 대로 시청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장면을 음미하거나 지루한 장면을 건너뛰기 위해 앞뒤로 왔다 갔다 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책을 읽듯이 TV를 시청합니다. 이리저리 건너뛰거나 다시 읽습니다. 때로는 속도를 높입니다. 때로는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요."

- 제프 구오 기자가 쓴 워싱턴 포스트 기사 ‘I have found a new way to watch TV, and it changes everything’ 중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wp/2016/06/22/i-have-found-a-new-way-to-watch-tv-and-it-changes-everything)

이나다가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빨리 감기는 내용을 파악하거나 정보를 얻는 데에는 적합하지만 감상을 위한 방법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서점에 들러서 이 책이 좋은지 아닌지 파악하려고 훑어보는 쪽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잘못 쓰면 당연히 독이다. 하지만 제대로 사용한다면, 스트리밍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데 좋은 약이 된다.

먼저 원하는 대로 영상을 즐겨도 좋다. 지난 2016년 워싱턴 포스트의 제프 구오 기자는 자신이 빨리 감기로 영화 보는 것에 푹 빠져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단순히 시간을 절약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재미있다고도 했다. 일방적으로 떠먹여 주는 영상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편집하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공부할 때는 빠르게 영상을 봐도 된다. 사람은 더 빠르게 말하는 강의와 영상을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The effects of time-compressed audio and verbal redundancy on learner performance and satisfaction ,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747563208000423) 읽거나 들으며 이해하는 속도가 입으로 말하는 속도보다 빠른 탓이다. 실제로 시각 장애인을 위해 텍스트를 읽어주는 프로그램에는 상당히 빠르게 말하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에서 나온 ‘도쿄대식 스마트폰 공부법’이란 책에서는 2배속으로 먼저 강의 영상을 흩어보라고 권한다. 그렇게 틀을 잡고, 라디오 듣듯 다시 듣거나 필요한 부분만 핀포인트로 집어서 영상을 보라고 제안한다.

셋째, 영상을 보면서 알거나 느낀 내용을 어떻게 아웃풋 할지를 생각하면서 보면 좋다. 빨리 감기 시청이 가지는 의외의 장점은, 영상을 집중해서 본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ADHD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영상을 빠르게 볼 것을 권한다. 이때 이 내용을 어떻게 요약할지, 아니면 필요한 정보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보면, 본 내용을 지식으로 남길 수 있다.

정보 수집이나 학습 목적이 아니어도 배속 시청은 다양한 용도로 이용된다. 미리 결과를 보고 싶거나, 무섭거나 싫은 장면을 건너뛸 때도 좋다. 반면 배속 시청의 단점은 대부분 코호트 소비, 다시 말해 친구 무리에서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볼 때 발생한다. 지인 추천은 중요한 정보지만, 행동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정보를 컨트롤하는 힘은 남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배속 시청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방법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긴 만큼, 뇌도 다르게 작동한다. 모든 것이 스트리밍으로 흐르는 시대, 배속 시청은 많아진 영상 정보를 처리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맞는 정보 처리 방법을 고민하고, 찾았으면 좋겠다.

IT 칼럼니스트 이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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