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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반차를 썼다. 반나절의 휴가. 올해 들어 처음 쓰는 휴가다. 쉬고 싶었다. 첫 휴가인 만큼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운전하기엔 피곤하다는 생각에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편히 갈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서 너무 먼 곳은 찾아 보지도 않았다. 지도 앱을 켜고 한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서울과 대전 사이, 한 도시가 들어왔다. 천안이었다.
천안 관광 지도(출처=천안 시청)
서울역에서 천안아산역까지는 KTX로 30분 정도 걸렸다. 기차를 탄 후, 화장실에 다녀와 인터넷으로 천안을 잠시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천안에 도착해 있었다. 이날은 일년 중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이었지만, 천안의 공기는 따스해 마치 완연한 봄날과 같았다. 점심 시간을 훌쩍 넘겨 천안아산역에 내리니 배가 고팠다. 역에서 택시로 20분정도 떨어져 있는 아우내 장터로 향했다.
순 우리말인 ‘아우내’를 한자로 표기하면 ‘병천(箳川)’이다. 그래서 아우내 장터는 병천 장터나 마찬가지다. 바로 이 시장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병천 순대가 탄생했다. 1960년대 이곳에 햄 공장이 생긴 후, 남겨진 돼지고기 부산물을 활용해 야채와 버무려 돼지 내장에 넣어 만든 것이 병천 순대의 유래다. 뜨끈한 사골 육수에 신선한 순대를 넣어 만든 순댓국밥은 인근 근로자들과 상인들에게 든든한 한끼를 제공했다.
아우내 장터에서 방송에 출연하지 않거나 지자체에서 맛집으로 선정되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중에 가장 메뉴 가짓수가 가장 적어 보이는 가게를 골라 1만1000원짜리 순대와 7000원짜리 순대국밥 두개를 주문했다. 한 사람이 먹기에는 좀 많았지만 남김없이 그릇을 비웠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선생이 떠올랐다.
(왼쪽) 병천 순대 거리에 있는 청화집의 순대국밥, (오른쪽) 아우내 장터의 어린이 장난감 가게
배부름을 꺼뜨리기 위해 아우내 장터 근처에 있는 역사 문화 둘레 길을 걷기로 했다. 전설적인 조선시대 암행어사인 박문수부터 우리나라에서 처음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홍대용까지 천안 출신의 위인들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관들로 갈 수 있는 코스들이 적혀 있었다. 그 중 가장 위에 소개된 것은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3.1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유관순이었다.
유관순 열사를 찾아가는 길은 아우내 장터 바로 앞에 있는 개천을 따라가야 했다. 억새가 우거진 하천을 따라 농기구로 가득한 가건물을 지나가니 유적지가 나왔다. 석양을 뒤로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 하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사람들을 반겼다. 그녀의 동상 앞에는 ‘그날의 함성을’이라는 글자가 목판 위에 새겨져 있었다.
유관순 열사의 영정에 향을 피우고 전시관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3.1운동 모습을 조각한 청동 벽화와 유관순의 사진이 나왔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보는 그 얼굴이었다. 안쪽에는 유관순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일제(日帝)가 가둬 두었다는 벽관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면 서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말그대로 벽에 서 있는 관이었다.
(왼쪽) 일제가 고문 도구로 사용했던 벽관 모형, (오른쪽) 유관순 기념관 중앙에 있는 유관순 동상
어느덧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완연한 봄기운은 사라졌다. 아우내 장터로 돌아와 천안 도심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천안 종합운동장 유관순 체육관으로 향했다. 미리 예매한 배구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천안을 연고지로 두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와 한국전력 빅스톰의 경기였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수많은 스카이워커스 깃발들이 보였다. 천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배구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택시기사는 ‘부산이 롯데야구라면 천안은 현대배구지요”라고 말했다. 현대캐피탈이 천안에 연고를 둔 것은 2005년 프로배구 V-리그를 출범할 때였다. 특유의 단단한 배구 스타일로 2015-2016시즌에는 프로배구 최초의 18연승을 기록했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되는 경기였지만 체육관은 한 시간 전인 오후 6시부터 인파로 가득했다. 경기장 앞에 위치한 스카이워커스 굿즈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티셔츠, 모자, 뱃지등을 구입하고 있었다. 현대캐피탈 선수들의 캐리커처를 사용한 캐릭터 상품들이 특히 인기였다. 미니 등신대와 머그컵 들이 눈길을 끌었다. 구단 캐릭터 몰리와 배구공 모양으로 만든 호두과자도 이곳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현대 캐피탈 스카이워커스 경기를 위해 유관순 체육관을 찾은 천안 배구 팬들
경기 시작 전 일부 관객들은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만나 직접 인사도 하고 사인을 받기도 했다. 현대캐피탈은 미리 신청한 팬들을 위해 라커룸을 잠시 공개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선뜻 팬들과 셀카를 찍고 티셔츠에 사인을 했다. 경기 시작 전 방해되지 않느냐란 질문에 우간다 용병 다우디 오켈로는 오히려 팬들이 찾아줘서 기운이 난다며 웃음을 지었다.
실내 관중들은 스마트 엔터테인먼트 기술을 통해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경기 관람 준비를 시작했다. 스카이워커스 선수들이 팬들을 위해 제작한 특별 신년인사 영상이 경기장 메인 전광판을 통해 보여지는 가운데, 경기장 안 팬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예능 프로그램에서와 같이 컴퓨터 그래픽과 결합되어 나오는 모습들을 즐겼다.
현대캐피탈이 배구 팬들의 편안함 관람을 고려해 도입한 각종 시설들도 돋보였다. 우선 관객들의 불편함을 최소화 하기 위해 관중석 규모를 기존 5000석에서 3900석으로 줄였다. 대신 VIP존을 없애고 이곳에 가족 고객들을 위한 패밀리존을 설치했다.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2층 특별석에서 사람들은 쇼파와 쿠션에 기대어 치킨과 김밥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전력을 상대로 스파이크 공격을 성공 시킨 다우디 오켈로(맨 왼쪽)와 환호하는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동료들
조명이 꺼지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선수 소개가 시작됐다. 현대캐피탈의 간판스타 문성민부터 우간다 용병 다우디 오켈로까지 출전 선수들의 사진이 레이저 빔을 통해 바닥에 그려졌다. 어웨이 팀인 한국전력의 선수들도 같은 방식으로 화려하게 소개되며 팬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190cm가 넘는 길쭉한 선수들이 배구공을 한 손에 들고 코트에 입장할 때마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들썩였다.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와 비교해서 배구는 관객석과 실제 경기 공간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 가장 가까운 1층석은 각 팀의 코칭 스태프가 하는 말까지 들릴 정도다. 강 스파이크로 배구공이 코트에 꽂힐 때마다 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 심지어 ‘배구공 주의’ 라는 팻말을 들고 다는 안내원들도 보였다.
이날 경기는 시작된 지 약 1시간30분만에 현대캐피탈의 완승으로 끝났다. 선수들은 코트에 남아 자리에 앉은 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인사했다. 문성민 선수는 대표로 인터뷰를 했다. 이날 경기에서 양팀 통틀어 최고 득점을 올린 다우디는 승리의 비결에 대해 팀워크라고 대답했다. 경기장을 나서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시계를 보니 이제 막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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