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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 설치된 예술작품이 사치로만 인식되던 시대가 있었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획일성과 효율성이었으며, 일하는 공간 또한 ‘일만’ 하기에 최적화된 공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기업들이 달라지고 있다. 창의성이 성공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으면서 기업 또한 창의력을 지닌 인재를 찾기 시작했고, 어렵게 찾은 인재들에게 끊임 없이 영감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옥 또한 능률만을 좇던 딱딱한 형태를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로 변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술작품을 통해 임직원의 감성을 자극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예술에 노출되면 개인의 창의성이 높아진다’는 ‘예술적 단서(artistic cues)’의 효과가 기업에서도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페이스북을 꼽을 수 있다. 페이스북은 근무 공간을 예술작품으로 가득 채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2012년부터 진행한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 ‘FB AIR’와 함께 전세계 근무 공간에 예술을 입힌 200여개의 프로젝트는 페이스북이 업무 공간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인 금융사에서 데이터 사이언스 컴퍼니로 탈바꿈하고 있는 현대카드·현대캐피탈도 예외가 아니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의사결정 과정을 단순화하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애자일 조직을 도입하고, 디지털 환경에 맞추어 기업문화를 새롭게 바꾸는 등 국내 기업 중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에 발맞춰 지정석을 없애고 책상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애자일 오피스를 도입하고, 사내 카페를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하며 휴식도 취할 수 있는 공유오피스 형태로 리뉴얼하는 등 공간의 변신 또한 거듭하고 있다.
특히 사옥 곳곳에 배치된 예술작품은 임직원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훌륭한 매개체가 된다. 여기 일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일상 속에 영감을 선사하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옥 내 예술 작품들을 도슨트 투어 형식으로 소개한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을 찾아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저희 회사 임직원들이 일하며 머무는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감을 얻을 수 있는 회사 안 곳곳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자, 함께 걸어볼까요?
Jeppe Hein
This is a magic moment
Neonbox, powder coated aluminium, neon tube, two-way mirror, powder coated steel, transformers
2016
100 x 100 x 10cm
Julian Opie
Sara, Walking, Bra and pants
Wall mounted LED Panel
2003
203 x 104 x 10cm
가장 먼저 1관 로비를 묘한 빛으로 물들이는 예페 하인(Jeppe Hein)의 ‘디스 이즈 어 매직 모먼트(This is a magic moment)’ 앞에 서 보겠습니다. 아, 도망가지 마세요. 많은 관람객들이 거울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면 방해가 될까 봐, 멀리 달아나곤 하는데요. 코펜하겐 출신의 설치미술가 예페 하인이 이 작품을 거울로 만든 이유는 관람객을 작품 안에 끌어들여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니까요. 그러니 이 작품과 마주할 땐 비단 작품 뿐만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나 자신 그리고 작품이 설치된 공간까지도 눈 여겨 보세요. 그 때에야 비로소 이 작품의 ‘마술 같은 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줄리안 오피(Julian Opie)의 LED 작품 ‘사라, 워킹, 브라 앤드 팬츠(Sara, Walking, Bra and pants)’ 또한 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담대한 윤곽선으로 단순화된 줄리안 오피의 작품 속 인물들은 인파로 가득한 도시 속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을 투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 스타일, 패션, 손에 들고 있는 커피 혹은 휴대폰, 심지어 걷는 모습까지, 모든 개인은 군중 속에서도 뭉개지지 않는 개성을 지니고 있죠. 이 작품 속에서 간결한 옷차림으로 뚜벅뚜벅 걷는 ‘사라(Sara)’에게선 왠지 모를 단단함이 느껴지는 것처럼요. 현재 LED 스크린을 새롭게 제작하고 있으니, 다시 만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Ian Wallace
Untitled (At the Crosswalk II)
Photo aminate with acrylic on canvas
2007
244 x 122cm
박선기
AN AGGREGATION 110209
숯, 나이론 줄, 기타
2011
Variable Dimensions
건너편으로 가볼까요? 직원들로 항상 붐비는 탁구대 뒤에 위치한 이안 월러스(Ian Wallace)의 ‘무제(Untitled, At the Crosswalk Ⅱ)’ 앞으로 말이죠. 이안 월러스는 후기 개념주의 사진운동의 대표 작가로 단색 회화와 사진을 병치시키는 방식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마주보고 길을 건너는 사진 사이로, 두 가지 색의 단색 면을 배치해 의도적으로 이미지를 생략했는데요. 바로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이미지가 관람객에게 상상의 공간을 열어줍니다.
뒤로 돌아서면 조각가 박선기의 ‘집합 110209(AN AGGREGATION 110209)’가 펼쳐집니다. 신라호텔 로비를 수놓은 아크릴 샹들리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골에서 나무와 함께 자라온 작가에게 나무의 변형된 형태인 ‘숯’만큼 중요한 소재는 없습니다. ‘집합 110209’ 역시 작은 숯 조각들을 가느다란 줄에 매달아, 하나의 덩어리가 된 듯한 착시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는 명확히 계단과 화분으로 보이던 숯 조각들이, 관람객의 위치를 바꾸면 형체가 흐트러지네요. 이렇게 작가는 물질을 해체하는 방식을 통해, 인간의 시각과 지각이 어떤 오류를 지니고 있는지를 경험케 합니다. 위치를 바꾸는 것 만으로, 물질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조우하게 되는 셈이죠.
Olivier Babin
11 FEV.1973
Liquitex on Canvas
2008
43x33cm
Jeff Zimmerman
Round Bubble
Hand-Blown Glass on Wire frame
2010
Variable Dimensions
1관 로비에 너무 오래 머물렀네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올리비에 바빈(Olivier Babin)의 작품 여섯 점이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날짜를 뒤집어 써 놓은 작품 세 점(’16 MAR. 1994’ ’26 MAI. 1993’ ’11 FEV. 1973’)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 출신의 개념 미술가 온 카와라(On Kawara)의 ‘날짜 그림(Date Painting)’ 연작을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온 카와라는 1966년부터 2014년까지 꾸준히 ‘오늘’을 그렸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캔버스 위에 배경색을 칠한 후, 오늘의 날짜를 산세리프 서체로 그려 넣었죠. 올리비에 바빈의 작품은 바로 이 온 카와라의 ‘날짜 그림’ 연작을 뒤집어 보는 제스처를 통해 자기 만의 작품으로 재탄생 시킨 유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마 온 카와라가 진짜의 ‘오늘’을 기록하고 싶었다면, 올리비에 바빈은 그 ‘오늘’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었나 봅니다.
이제 2관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로비 천장에 설치된 제프 짐머만(Jeff Zimmerman)의 유리 작품 ‘라운드 버블(Round Bubble)’이 통창에 반사돼 더욱 반짝입니다. 제프 짐머만은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는 사물과 현상을 주목하며 그 순간의 경험을 환기시키는 작가입니다. ‘라운드 버블’ 역시 비누 방울 혹은 거품처럼 찰나에 사라지는 물질을 마치 순식간에 얼린 것 마냥,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합니다. 화려한 샹들리에인 줄로만 아셨다고요? 차분히 다시 보면 비누 방울과 유리가 동시에 선사하는 여리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이 다가옵니다.
Erwin Wurm
Dumpling Car
Mixed Media
2018
250 x 443 x 180cm
오늘의 마지막 주인공은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옥에 가장 최근 합류한 에르빈 부름(Erwin Wurm)의 ‘덤플링 카(Dumpling Car)’입니다. 지난 2014년 세계적인 디자인 어워드인 ‘IF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한 현대카드의 컨셉트 택시 ‘My Taxi’를 재료로 했죠. 현대카드 스토리지에서 진행된 전시 'Erwin Wurm: One Minute Forever'가 끝난 후,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에르빈 부름은 자동차, 건축물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몸에 이르기까지 물체의 부피와 질량에 변형을 주는 실험을 계속해 온 작가입니다. 처음 만난 ‘덤플링 카’는 부풀어 오른 듯한 형태와 파란 색의 몸체 그리고 익살스런 눈, 코, 입 덕분에 희극적인 요소가 먼저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 다음엔 에르빈 부름이 고정된 사물의 형태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던지는 질문에 맞닥뜨립니다. ‘과연 사물의 외형이 바뀌어도,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하고요.
사실 회사원의 일상은 늘 비슷한 모습입니다. 새로운 자극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죠. 그럴 땐 사내 예술작품을 마주해보면 어떨까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옥에서 만난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예술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서도 어제와 다른 영감을 선물하기도 하니까요.